Life well travelled
느긋한 주말 데이트 blute 본문
느긋한 주말 데이트..라고는 해도
실상은 오피스텔 1층 파리바게트에서 벽 뚫는 공사를 하느라 드릴 소리에 망치 소리에..
머리가 울리고 심장이 두근대서 대피하듯 집에서 나왔다.
둘 다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다보니 한남동으로.
평일에도 질리게 오는 한남동이라 주말에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지만,
가로수길, 삼청동, 홍대..서울 시내에 괜찮다싶은 카페가 있는 곳은 대부분 인파에 몸살하기 십상.
주한멕시코 대사관 옆으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면 보이는 하얀 건물 1층 플라워 카페 <blüte>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약간 습한 공기와 갖가지 꽃과 풀내음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화원 같은 곳.
체감하기에는 아직 겨울인데, 봄이 만개한 것 같은 카페 내부.
그래서 카페 이름도 blüte(꽃의 만개)인가 보다.
손글씨라고 생각했던 메뉴판 글씨는 알고보니 타이포그라피.
메뉴 뿐만 아니라 화분 하나 하나에도 같은 타이포를 사용해서 카페 이름을 새겨놓았다.
작은 카페지만 디테일까지 일관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정성스러움이 보인다.
트렌지스터 라디오, 타자기, 팬선풍기 등 빈티지 소품은 과하지도 도드라지지도 않는다.
마스킹 테이프로 아무렇게나 붙여놓은 듯하지만 사실은 꽤 정성 들였을 사진들도.
코이케 류노스케의 <생각 버리기 연습>과 오구라 히로시의 <서른과 마흔 사이>를 번들로 주문했다.
"서른과 마흔 사이?"라며 웃는 신랑 때문에 부끄러워져서 <생각 버리기 연습>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블뤼테 라테가 나왔는데..정말 잘 어울리는 토끼다.
커피가 줄어들면서 토끼 얼굴이 점점 스크림으로 변한다.
가뜩이나 요즘 여행에 눈뜨기 시작했는데 마침 잡은 책이 <르네상스 창조 경영>이어서 이탈리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마사초의 그림이 있는 피렌체 카르미네 성당과 브란카치 예배당에도 이렇게 혹하는데,
책 후반부에 엘 그레코나 메디치 가문 얘기가 나오면 스페인 톨레도나 베네치아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일까.
이러다 여름 휴가는 이탈리아로 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고, 사진도 찍고, 커피 마시고 이야기도 하면서..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식물에 둘러쌓인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코지하고 빈티지한 카페가 좋다. 요즘의 나는.
모던하고 깔끔한 카페를 좋아했던 예전에 나였다면 '너저분하다'고 생각했을 분위기와 짝이 맞지 않는 의자들도 편안하다.
이병우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류이치 사카모토 'Rain', 'ピアノの森(피아노의 숲)'..
선곡마저 감동적이던 일요일 오후, 블뤼테에서의 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