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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well travelled
약정이 9개월이나 남은 아이폰이 말 그대로 "산산이" 부서졌다. 혓바닥은 이유 없이 찢어져서 피인지 밥인지 모를 식사를 하고, 오른발 신경이 눌려서 이틀에 한번꼴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우호적 관계라고 생각했던 회사 동료는 하루 아침에 적이 되고, 그 덕분에 피할 겨를도 없이 업무 쓰나미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삼재(三災). 미신 따위 믿고 싶지 않지만, 이게 아니라면 작년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악운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자 이제 그만하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나에게도 "뜻밖의 행운"을 보여줘.
나에게 뮤지션을 단 두 명만 꼽으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이승환-김동률. CD 플레이어, MP3, 지금 아이폰까지..내 귀에 항상 걸려 있었던 음악들. 중고등학생 때 환님에게 가열차게 팬질하다 그가 장르를 바꿔 활동하면서 대학생 때는 률님에게 홀릭했다. 집도 친구도 없던 프랑스에서의 첫 가을, 두(Doubs)강변에서 아주 긴 산책을 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두 가지. 낙엽 냄새와 비 오기 전날의 흙냄새 묻은 가을 바람, 그리고 김동률 3집 프랑스 유학 시절을 함께한 연인 같은 목소리. 브장송에서 만났던 지현 언니 덕분에 더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오빠가 TV에 나오면 어떤 기분이냐 물었었는데, 이제는 온군이 TV에 나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 내가 되었다.) 2013년 1월 19일. 그..
마포역 근처에는 온통 고기 굽는 집들 뿐이라 백숙 한 번 먹으려면 성북동까지 가야 했는데, 공덕 주민 생활 1년 반 만에 찾아낸 맛집 베스트웨스턴 서울가든호텔 뒤편 좁은 골목에 있다해서 찾기 어려울까봐 걱정했건만. 이런..그냥 지나칠 수 없구나. 낮에는 주변 직장인들 때문에 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데, 한여름 해 떨어진 시간이라 기다리진 않았지만 여전히 손님은 많다. 우리가 밥 다 먹고 문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몇 테이블 비었다. 오래되었지만 허름하거나 지저분하지 않은, 그럼에도 장사 잘되는 집만의 특유한 느낌이 있다. 간판도 메뉴도 온통 "옻닭을 먹으라"고 권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삼계탕을 시키는 굳은 심지. 삼계탕은 14,000원. 이 집의 주력 메뉴인 옻닭은 19,000원, 옻오골계탕..
여의도 증권가에서 보기 드물게 섬세한 감성을 가진 남자 최서방. 오히려 회사일 때문에 정신적으로 황폐하고 메마른 나를 위한 최서방의 선물, 어쿠스틱 카페 내한공연 티켓. 클래식이 대하소설이라면, 어쿠스틱 카페의 음악은 에세이. 가사 없이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느낌. 그리고 어젯밤의 나에게는 해열제였다. 퇴근할 때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열이 오른 머리와 마음을 식혀주는. 'Cinema Paradiso'를 시작으로 마지막 앵콜곡까지 두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수 있나. 삼키기 아까워 입에서 조물거리는 맛있는 음식처럼 혹여 귀에서 그냥 흘러가버릴까봐 마음에 머리에 한 곡 한 곡 담아두었다. "맘 먹고 즐겨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츠루 노리히노. 서툰 한국말이었지만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통역을 쓰지 않고..
선명한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긁혀 생긴 흉터도, 사람에게 상처 받아 힘들었던 기억도, 비오는 제주의 하늘처럼..뿌옇게 흐려질 때 더 좋은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 많은 것들이 흔적을 찾기 힘들만큼 흐릿해지더라도 당신만 선명하면 괜찮다. 창에 맺힌 빗방울처럼, 내게는 당신만 선명하면 괜찮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페리에 배달하러 온군 집에 들렀는데 발바닥만한 아이가 뛰어나왔다. 태어난지 이제 두 달된 푸들. 온군 발목에 딱 붙어서 쫓아다니는 녀석의 이름은 온군의 "꼬봉"이다. 소파에 올려놓으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엄지 손가락만한 꼬리를 흔든다. "내려달라고. 온군한테 가야된다고!" 아무리 불쌍하게 쳐다봐도 안내려줬더니..체념한듯한 저 시선 끝에는 온군이 있다. "온군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구나.." 가뜩이나 집에서 잘 안나오는 온군, 꼬봉이 덕분에 집귀신될 판.
봄맞이 집청소를 하면서 뽀얗게 먼지 앉은 커피나무를 씻겼다. 작년 여름 우리집에 데리고 와서 아침저녁으로 물 주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람도 안먹는 영양제를 먹여 키운 커피나무.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여서 조금만 한기가 들어도 고사한다기에 겨울은 어떻게 나나 싶었는데, 잎도 예닐곱 개밖에 없던 커피나무가 이렇게나 무럭무럭 자랐다. 지금처럼 무럭무럭 자라면 3년쯤 지나서 커피 열매가 열린다고 했다. 그 커피에서는 아마도 향긋한..영양제 맛이 날 것 같다-
제대 후 쉴 틈 없이 드라마 두 편, 영화 한 편을 마친 온군에게 찾아온 휴가. 나라면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탔을텐데..온군은 보기보다 여행 욕심이 없다. 그런 온군이 시작한 쌩뚱맞은 소일거리. 동대문 종합시장에서 직접 고른 스톤으로 한 땀 한 땀 팔찌 만들기- 심지어는 이 시간에 마포에 친히 배달까지. "생각보다 잘 만들었다"고 했다가..얼마나 비싼 스톤으로 고생스럽게 만든건지 구구절절. 심심해서 시작했는데 이것저것 사다 보니 일이 커진거 같고, 그렇다고 팔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만들기는 해야 되고, 오죽하면 이 밤에 이걸 들고 마포까지 왔겠나. 그런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잘 만들었다. 이 꼼꼼하고 섬세한 작업을 남자 손으로 했다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팔찌에 따라온 'la prairie' 배보다 배꼽이 ..